- 지푸라기
정호승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 알곡을 거두고 남은 볏짚의 부스러기인 지푸라기는 아무 쓸모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온돌과 취사에 사용되고,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소의 여물로 쓰이고, 긴 새끼줄이 되고, 비를 막아주는 지붕이 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짧게 썰린 몸은 흙과 범벅이 되어 흙벽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귀하게 쓰이는 때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 주는 때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했습니다.
물에 빠지는 위태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는 생의 전부일 수 있고, 한 줄기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푸라기는 희망의 문이 열리는 거룩한 암구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지푸라기로 취급당할 때가 있습니다.
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실패하여 좌절하고,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상처만 가득한 지푸라기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 풍파에 시달려 이리저리 길바닥에 나뒹굴며 사람들 발에 짓밟힐 때가 있습니다.
짓밟히지 않으려고 애를 써봐도 그냥 짓밟혀 마냥 서럽게 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신이 왜 지푸라기가 같은 인생이 되어야 했는 지 그 암호를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해석한 내용은 시인은 지푸라기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푸라기가 되어 이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잡히기 위해 서럽게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풍요로운 삶이 지속되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생각은 견디기 어려운 삶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만이 해 본 생각입니다.
지푸라기가 생각났다면 이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푸라기가 필요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왔는 지 시인이 알려줍니다.
헤쳐나온 후 시인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지푸라기를 찾는 다른 이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런 기다림을 자신의 소명이라 노래합니다.
– 사는 동안 지푸라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일어서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숨기듯이 하는 우리들의 말과 행동으로 전해집니다.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그냥 보고 싶어서’라고 말하거나, 늦은 밤 취한 목소리로 ‘그냥 전화해 봤어’라는 말을 할 때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생각하는 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누군가의 지푸라기가 된 적이 있는가?’
살다가 힘들 때 안기고 싶은 누군가의 마음, 그 작은 마음이 지푸라기가 아니겠습니까?
살다가 힘들 때 듣고 싶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지푸라기가 아니겠습니까?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 잡고 싶은 손, 그 작은 손이 지푸라기가 아니겠습니까?
큰마음, 큰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마음, 다정한 목소리, 작은 손이 지푸라기가 되고, 새끼줄이 되고, 보금자리가 되고, 흙벽돌이 되어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칼럼리스트 이승정